[Interview Article] Seoul Economy - 한국에 온 건 인생 최고의 선택… 열정,역동성에 흠뻑 빠졌죠
AMCHAM Korea News Clipping MediaSeoul EconomyDate August 05, 2017 Title 한국에 온 건 인생 최고의 선택… 열정,역동성에 흠뻑 빠졌죠 Link http://www.sedaily.com/NewsView/1OJMDGYZUUSource Print (A4) and Internet News 제프리 존스(65) 주한미상공회의소(AMCHAM·암참) 이사장은 흔히 ‘파란 눈의 한국인’으로 불린다. 국적은 미국이지만 40년 가까이 한국에서 살았고 한국을 ‘우리’라고 표현하며 한미 양국의 가교역할을 해왔기 때문이다. 본업은 김앤장법률사무소 미국변호사지만 암참 이사장으로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개정 협상 등 현안에 대한 조언도 아끼지 않는 그를 지난 7월13일과 28일 서울 종로 김앤장 사무실에서 인터뷰했다. 한국에 대한 인상과 소회부터 소개했다. 그는 “한국에 온 것은 내 인생 최고의 선택”이라며 “한국인들의 열정과 역동성에 흠뻑 빠져들었다”고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한국과의 첫 인연이 궁금하다”는 질문에 그는 집안 역사를 꺼냈다. “1700년대 선조들이 미국에 오셨는데 대대로 모르몬교였어요. 지금은 사라졌지만 옛날에는 일부다처제 전통이 있어 고조할아버지는 부인 4명을 두기도 했지요. 저는 회계·재정 담당 공군이었던 아버지의 근무지인 아이다호주 사막지대에서 태어나 토끼와 개구리를 잡고 놀다가 7세에 LA로 이주했고 고교 때 매사추세츠로 갔지요. 하지만 대학은 모르몬교의 본산인 유타주 솔트레이크의 브리검영대로 진학해 법학학사와 석사를 했습니다. 아버지는 베트남전쟁이나 그린란드 근무 등 가족과 떨어져 계실 때도 많았지만 지금은 LA에서 어머니와 같이 잘 계십니다.” 한국과의 첫 인연도 대학시절인 1971년부터 2년간 모르몬교 선교사로 서울·수원·마산에 머무르며 봉사활동을 하면서다. “당시 한국전쟁의 엄청난 아픔을 딛고 일어서던 한국인의 성실함과 높은 교육열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는 그는 1978년 변호사가 돼 베이커앤맥킨지 도쿄사무소에서 근무하며 서울을 오간다. 하지만 그해 시카고 본사로 복귀명령을 받았다가 1980년 김영무 김앤장 변호사의 스카우트 제의로 한국에 정착한다. “미국 법도 자문하고 기업의 해외 자금조달을 지원하며 보람이 있었지요.”하지만 자녀 6명을 둔 채로 “한국에서 살기 싫다”는 전 부인과 이후 헤어질 수밖에 없었고 컴퓨터학원 강사였던 한국인 부인을 만나 아들 둘을 더 두게 된다. “와이프는 천주교도인데 아들 둘을 군대에 보내기 위해 국적을 한국으로 하려다가 ‘외국인학교에 못 보낸다’는 얘기를 듣고 할 수 없이 미국 국적으로 했지요. 큰딸은 태국에서 가수로 활동하고 둘째 아들은 LA 정보기술(IT) 회사 다니며 셋째아들은 주한 미대사관에 근무하고 넷째딸은 유타에서 살림하고 다섯째딸은 애틀랜타에서 유명 개그우먼으로 활동하고 여섯째 아들은 네덜란드에서 무용수로 명성을 날리고 있습니다. 올 크리스마스 때는 서울에서 다 같이 모일 예정이에요. 손주도 16명인데 이름도 다 기억하죠(웃음).” 그는 “대가족을 이룬 것이 뿌듯하겠다”는 말에 “할 일을 다 했고 인간의 의무감을 달성한 느낌”이라고 답했다. 그는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의 폭풍이 몰아쳤던 1998년부터 2002년까지 암참 회장을 맡아 외국 기업 투자유치 등 한국과의 시너지 모색에 나섰다. “(2002한일월드컵을 앞두고) 국가 브랜드로 채택된 ‘다이내믹 코리아(Dynamic Korea)’도 한 위원회에서 제안하고 ‘금융·물류허브’ 추진도 주장하는 등 왕성하게 활동했습니다.” 2003년에는 외국인으로는 처음으로 규제개혁위원으로 활약했고 2004년부터 6년간 포스코·두산 사외이사와 한국관광공사 이사 등으로 활동했다. 최근에는 암참 이사장으로 복귀했고 김앤장에서 국내외 기업 자문과 함께 한국GM과 미국 자동차부품사 사외이사로서 분주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 그는 오는 8월 개시되는 한미 FTA 개정 협상과 관련해 “‘바이아메리카펀드(Buy America Fund)’를 만들어 공공조달 시장에서 경쟁력 있는 미국산 제품의 구매도 늘리고 미국산으로 에너지 수입선도 다변화하면 좋을 것 같다”고 말했다. 한미 정상회담(6월28일~7월2일) 당시 미국에 갔을 때 미국 액화천연가스(LNG) 제조사 2곳 관계자를 만났더니 “‘한국에 배달까지 해 카타르 가격 수준에 맞추겠다’고 하더라”고 전했다. 양국이 이익의 균형을 좀 더 맞춰야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사드) 등 한국의 외교·안보·남북관계 측면에서 유리할 것이라는 말도 덧붙였다.그는 “국방부가 프랑스·독일·이스라엘 등에서 무기를 조달하지 말라는 것은 아니지만 전투기 등 경쟁력 있는 미국산을 사는 게 좋고 국공립병원에서도 의료기기나 기자재를 많이 구입하는데 미국산을 쓰면 역시 도움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우리(한국)가 연간 수백조원의 에너지를 대부분 중동에서 들여온다”며 “미국 LNG나 셰일가스·석유를 일부 구매하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굉장히 좋아하며 마음이 부드러워질 것”이라고 했다. 이와 관련해 한국가스공사는 미국 셰일가스를 7월 첫 도입한 뒤 앞으로 20년간 연 280만톤(약 1조3,000억원)씩 들여올 예정이며 현지 셰일가스 프로젝트 지분참여 등도 논의하고 있다. 그는 “미국 무역대표부(USTR)가 ‘한미 FTA 발효 이후 미국의 상품수지 적자가 2배로 늘었다’고 하는데 서비스수지에서 한국이 큰 적자를 내고 있고 미국에 투자도 많이 하는 점도 같이 고려해야 한다고 본다”고 지적했다. 이어 “하지만 한국이 무슨 말을 해도 트럼프 대통령은 통상압박을 할 것”이라며 “신임 로버트 라이트하이저 USTR 대표가 철강덤핑 전문 변호사로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때 USTR 부대표를 지내 경험도 많고 한국이나 무역에 관해 잘 알지만 트럼프가 로열티(충성) 개념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해 유연성이 크지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그는 “미국이 한국산 철강에 잇따라 반덤핑관세를 부과하고 있는데 압박은 이어질 것이고 자동차도 현대차가 미국에서도 차를 제조하지만 대미흑자를 많이 내고 있어 개방 압력이 가중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서비스 시장은 어떻게 되겠느냐”는 질문에 “트럼프 대통령은 외국 물건 수입 증가나 IT 발전 때문에 제조업 일자리가 없어지는 데 문제의식이 많다”며 “서비스 분야는 그다음”이라고 답했다. 미국이 법률시장 추가 개방(외국 로펌 지분과 의결권 49%로 제한)이나 스크린쿼터(한국영화 연 73일 상영보장) 완화 등을 요구할 가능성이 크지만 제조 쪽이 우선이라는 것이다. 그는 “USTR 웹사이트 연례 무역보고서에 한미 FTA의 문제점들이 나온다”며 “가장 우려하는 것이 쌀농사가 있는 지역구 의원들의 ‘한국 쌀시장 개방’ 요구로 그러면 진짜 머리가 아프게 돼 미리 준비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어 “강경파인 피터 나바로 백악관 국가무역위원회(NTC) 위원장을 방문했더니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나프타)을 활용해 멕시코를 통해 미국에 덤핑하는 사례가 많고 한국 기업들이 LA로 옷(원부자재)을 보내 미국 브랜드로 캐나다와 멕시코에 보내는 불법도 많이 저지른다’고 지적하더라”고 전했다.마지막으로 “봉사활동도 많이 하더라”는 질문에는 “1980년에 한국에 와서 교회활동은 했지만 봉사는 많이는 못했고 암참 회장 시절인 2002년 암참 산하에 ‘미래의동반자재단’을 만들어 지금까지 2,650명의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줬다”고 했다. 이어 “2015년부터는 한국로날드맥도날드하우스 이사장으로서 장기입원 어린이환자와 가족을 지원하고 있다. 가족이 병원 근처에 머물며 아픔을 나누고 힐링할 수 있는 집을 우선 경남 양산에 연내 마련하고 서울과 대구에도 각각 2곳과 1곳을 건립할 계획”이라며 활짝 웃었다.인터뷰를 마치며 “나중에 한국인으로 국적을 바꿀 생각은 없느냐”고 농을 하자 “부모님이 서울에서 3년간 사시기도 했지만, 모친이 계시는 한 절대 안 된다. 배신자 소리를 듣는다”며 손을 내저었다.
2017.08.05